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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의 트레이드

투수가 공을 던지기전 웅크린 자세

베이브 루스의 트레이드

 

1920년은 미국 야구 역사에 기념비적인 사건들이 많이 터진해로 기억된다.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베이브 루스의 트레이드였다. 극장 사업에서 큰 손실을 본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는 발군의 투수이자 홈런 타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신성’ 베이브 루스를 10만 달러를 받고 뉴욕 양키스에 팔아버렸다. 추가 35만 달러를 융자받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런데 당시 베이브 루스만 양키스로 보낸 것이 아니었다. 주전 선수이던 포수 월리 샹, 유격수 에버렛 스캇, 투수 웨이트 호잇 등도 루스와 합류했고, 이들이 루스와 함께 양키스 왕조의 건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1912년 이래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레드삭스의 전성기는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밤비노의 저주’라고 불린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징크스는 2004년에야 종지부를 찍었다. 특히 그 해 AL 챔피언십에서 숙적 양키스에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기적적인 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는데 1918년 우승 이후 무려 86년만이다.

1919년부터 유난히 극성을 부린 인종 갈등과 차별로 흑인들의 메이저리그 복귀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비 포스터와 솔 화이트가 니그로리그를 창설한 것도 1920년이다.

이들은 8개 팀으로 구성된 ‘니그로내셔널리그(Negro National League)’를 만들었고, 첫해 포스터의 구단인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가 우승했다. 화이트는 1947년까지 생존해 재키 로빈슨이 다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변칙투구 금지

 

같은 해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일은 MLB에서 인위적으로 공을 훼손시키거나, 이물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며, 공에 침을 뱉는 스핏볼(spitball)과 흠집을 내는 스커프볼(scuff ball), 에머리볼(emery ball) 등의 변칙 투구를 금지한 것이다. 단, 예외 조항으로 17명의 스핏볼 전문 투수들은 은퇴할 때까지는 자신들의 주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장 그들을 실업자로 내몰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타자들이 기를 펴기 시작했고, 특히 AL에서는 장타와 홈런이 급증했다.

1920년 5월 1일 베이브 루스가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첫 홈런을 터뜨렸다. 베이브 루스는 5월에만 12개의 홈런을 쳤는데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다. 한 팀에서 시즌 내내 12개의 홈런을 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던 시절에 한 타자가 한 달만에 홈런 12개를 쳤던 것이다. 당황한 양키스는 외야 펜스를 6미터 이상이나 뒤로 옮겼지만 베이브 루스는 그 해 54개의 홈런을 쳐냈다. 1919년에 자신이 세웠던 29개 홈런 기록을 무려 25개나 넘어선 것이다.

 

빅리그 역사상 유일한 타자 사망 사고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6월 16일 양키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소의 경기에서 인디언스의 인기 스타이던 유격수 레이 채프맨이 양키스의 서브마린 투수인 칼 메이스의 공을 머리에 맞고 의식을 잃었다. 결국 채프맨은 다음날 사망했다. 메이저리그 경기 중 유일하게 발생한 사망 사건이었다.

빅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타자를 사망케한 칼 메이스 루수 이런 비극이 발생한 원인은 너무 헐고 잿빛으로 변한 공을 채프맨이 제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항상 새 공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이때 생겼다. 불법 투구 금지에 이어 타자들에겐 더욱 유리한 조치였지만 채프맨의 비극이 있고 나서야 그런 규정이 생겼다.

1920년 9월 28일에는 시카고 대배심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타플레이어 ‘슈레스’ 조 잭슨을 비롯해 8명의 선수들이 도박사들의 사주로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고의로 패했다며 기소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들에게는 ‘블랙삭스’ 라는 오명이 붙었고, 화이트삭스 구단주 챨스 코미스키는 이들 8명을 모두 출전 정지시켰다. 우승 후보이던 화이트삭스는 페넌트 레이스에서도 탈락했다.

‘블랙삭스 징크스’ 역시 끔찍하게 오래 화이트삭스 팬들을 괴롭혔다. 1917년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우승했던 화이트삭스는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에 져주기 게임으로 우승 반지를 끼지 못한 후 88년만인 작년에야 다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20년 월드시리즈에서는 시즌 막판에 화이트삭스를 두 게임차로 제치고 AL 챔피언에 올랐던 인디언스가 NL 챔피언 브루클린 다저스를 5승2패로 꺾고 우승했다.

 


슈레스 조 잭슨

‘슈레스 조’라는 애칭으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조 잭슨은 1919년 화이트삭스의 ‘블랙삭스 스캔들에 휘말려 야구계에서 퇴출당한 비운의 스타였다.

1908년 필라델피아 에이스에서 MLB에 데뷔한 잭슨은 1921년 초대 커미셔너인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에 의해 야구계에서 완전히 추방될 때까지 12년간 클리블랜드를 거쳐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그의 통산 타율은 3할5푼6리(역대 3위)로 타이 콥과 비견될 정도였다. 1911년에는 4할8리를 치기도 했으며, 베이브 루스는 잭슨의 타격 폼을 따라 배웠다고 했을 정도다.

우투좌타였던 잭슨은 어려서부터 방직공장에서 일해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서류 등의 서명을 그의 부인이 대신했다. 그러나 13세부터 방직공장의 야구팀 외야수로 뛸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가 ‘슈레스’ 즉 ‘맨발의’ 잭슨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당시부터다. 스파이크를 새로 받은 잭슨은 물집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타석에 들어설 때는 아예 맨발로 나섰고, 그가 루 상에라도 나가면 맨발로 뛰는 것이 대번 팬들의 눈에 띄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슈레스 잭슨은 야구계에서 추방되며 명예의 전당에도 들어갈 자격을 잃었다. 그러나 많은 팬들은 그가 도박사들의 매수 스캔들에 관련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의 복권을 요청하고 있다. 실제로 잭슨은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8게임을 전부 뛰면서 3할7푼5리에 1홈런, 6타점, 2루타 6개의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참조 :  싸이 영의 위상에 강력히 도전하는 투수 월터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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